티스토리 뷰

1990년대 정권과 언론

 

- 노태우부터 김대중까지

 

1. 노태우 정권하의 언론

 

  1987년 12월 16일 야권의 분열과 부정, 불공정 선거로 노태우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실질적인 군사 정권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이 6월 항쟁에 굴복해 16년 만에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통해 탄생된 정권이었기 때문에 민주화라고 하는 시대적 대세에 어느 정도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언론 자유 확대와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 이러한 외적인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변화도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언론사 내부의 민주화 움직임이었다. 1988년 4월부터 한국 최초의 노조파업이 부산일보사 노동조합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와 더불어 국민주 방식의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세상을 바꾸자며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어리석은 꿈'에 합류한 이들을 노태우 정권이 곱게 볼 리 없었다. 청와대 기자실이 너무 비좁다는 이유로 2년 5개월이나 청와대 공부 시설인 춘추관이 완공될 때까지 출입을 거부당하게 된다.

 

  제 13대 4.26 총선에서 의석 과반수 확대에 실패한 노 정권은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을 막지 못했고,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88년 전국 1만 3천여 언론 노동자의 결집체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이 탄생함으로써 언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심지어는 조선일보까지도 민주화 운동에 고개를 내밀게 되었지만, 노조 투쟁의 실패로 그 후 사원들의 복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노사가 한 목소리를 내는 기이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신문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키기 위해 치열한 증면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 후에도 증면 경쟁은 계속되었고, 이것은 지면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노 정권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한 것은 아니었다.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점점 늘어난 것도 필연적인 일일 뿐이었다.

 

  노 정권하에서 더욱 철저해진 신문의 자본 논리가 만들어낸 최악의 모습은 이른바 '양비론'과 '국가 안보 혐오주의'였다.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신문들은 양비론으로 국민의 정치 혐오주의를 부추겼으며, 공안 정국이 형성될 기미가 보이면 국가 안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위기를 창출하고 고조시키는 작태를 일삼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편집장을 지낸 데이비드 할보르센은 한국의 언론 현황을 살펴본 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에 <한국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어떻게 탕진하고 있나>라는 칼럼에서 "그들은 당시 날카로운 생존 감각을 터득했으며, 오늘날에는 정부의 바람을 미리 읽어내는 동류의식을 구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시대에도 역시 언론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성실히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김영삼 정권하의 언론

 

  1992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3당 합당의 결과로 탄생한 김영삼 정권은 '문민'을 강하게 부르짖었지만 언론을 권력의 도구로 보는 '도구적 언론관'에 있어서만큼은 과거 정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여론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못 참는 김영삼은 'YS는 신문 사설 보고 정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지난 40년 정치생활 동안 신문 1면 톱을 가장 많이 차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언론계의 주요 이슈가 되었던 것은 ABC(발행 부수 공사제)의 도이이었다. 찍어내자마자 곧장 폐지 수집소로 향하는 3백만 부의 신문 낭비를 막고 깨끗하고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을 위해 필수적으로 도입해야 했던 ABC는 신문사들 간 이해 상충으로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1997년 대선 기간 중 아닌 밤 홍두깨 식으로 밀어닥친 이른바 'IMF 신탁통치'를 통해 너무도 드라마틱하게 입증되었다. 한국 언론은 언론의 제 1기능이라 할 환경 감시기능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3. 김대중 정권과 언론

 

  대부분의 국민을 고통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IMF 사태는 사회 각 분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거품'이 가장 많았던 분야라 할 언론에겐 존재 기반을 위협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 신문들은 그런 서바이벌 게임을 위해 대량 해고와 감봉 등을 실시했는데, 19985년 5월에는 실직 언론인이 이미 4천명을 넘어섰다. 이는 그간 신문들이 '거품 경제'에 취해 흥청망청해 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후 신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도가 신문사의 광고 전략의 일환이 되어 노골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신문 찍자마자 내버리기'가 자행되었고, 신문을 많이 팔수록 손해라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우리 신문들이 미쳐 돌아간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윤전기 도입 전쟁도 <빚더미 나라에서 과연 할 짓이었는지>라는 인터뷰가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언론 산업을 넘어서 국가 전체의 차원에선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일부 유력 언론사들에 의한 언로의 독과점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1997년 대선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저지른 '언권 선거'였다. 김대중은 그런 불리한 여건에도 당선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간 일시적인 좌절과 후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적어도 6월 항쟁 이후로부터 계속 민주화의 진전을 거듭해 왔으며 건국 이래 최초로 50년 만의 수평적,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적어도 언론 민주화만큼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완성되었다. 역대 정권들의 언론 통제 창구였던 공보처도 폐지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대통령서부터 청와대 참모, 국민회의에 이르기까지 언론에 대해 순진하고 무지했다. 아니 그들은 언론을 잘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늘 언론으로부터 두들겨맞고 보도를 구걸하다시피 하는 데에 익숙한 야당적 관점에서의 노하우였을 뿐 국정 운영에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이었다. 언론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 결과 6.4 지방선거는 지역감정 선동의 잔치판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가 공식 출범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가장 의미있는, 언론 개혁을 위한 실천이다. 언개연은 언론 법제 개선 운동, 수용자 운동, 대안매체 운동 등을 과제로 내걸었는데, 물론 신문들은 이 운동을 마땅찮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언론 개혁 운동은 자게는 언론계 내부의 부정부패부터 척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언론은 여전히 카멜레온이고 하이에나이지만, 정치권력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는 언론 권력으로서 오히려 정치권력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나마 우리가 언론계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

8~9년 전에 쓴 레포트. 감회가 새롭다 ㅋ

 

 

 

공지사항
글 보관함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