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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工夫]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기술이나 학문을 익히다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동사형으로는 공부하다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공부에 힘쓰다"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고, 검색을 해 보니 연암 박지원, 율곡 이이 선생의 글이나  몇 권의 책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글은 서평을 가장한 '왜 책에서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어지는 문장이 어째서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공부하다와 공부에 힘쓰다의 차이는 이렇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부의 의미는 학문에 한정되어 있을 뿐, 기술적인 측면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두뇌를 사용하는 전문적인 기술은 제외하고 육체적인 Skill을 기술이라 가정했을 때)은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그 말 그대로 기술로써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배워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현대 사회에서는 육체를 사용하는 전문직업은 두뇌를 사용하는 직업보다 경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서 공부의 카데고리가 세분화되고 단어가 분절화되면서 의미가 구분되어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공부를 업으로 하는 학생들에게는 공부란 스트레스의 발로일 뿐이다. 공부는 어느새 힘써야 할 것이 아닌, 묵직한 무게를 가진 의무로써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이유를 '시험'으로 들고 있다. 물론 '시험'을 안 보게 된다면 좋아라 할 학생들이 대다수이겠지만, 현대인들이 지식의 척도를 측량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시험이다.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굳이 왜 구구절절이 늘어놓느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적인 물음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정리한 글이라는 점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또 이 책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학생의 신분을 벗어던짐과 동시에 우리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요즈음의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반에 30명이 있다고 치면, 30명은 모두 살면서 흥미를 가지는 부분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 흥미를 몇 가지로 제한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흥미를 학교의 커리큘럼에 맞춰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것을 성공한 사람들은 공부를 잘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공부를 못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학생 중에는 공부를 좋아해서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할 뿐)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부분은 살면서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의 필요와 관심과는 무관하게 선생님들이나 교과과정의 틀이 그 접근 방식과 과정을 정해주기 때문에 당연히 흥미를 느낄 수 없다. 지식의 확장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른 접근 방식과 과정을 가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지식 또는 지혜로의 끌림이다.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면 이런 타의적 커리큘럼을 벗어나 자의적 커리큘럼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되고,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공부의 필요가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의 필요성을 전제하지 않고, 나 자신의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사회적인 프레임으로써 작용하여 생존경쟁의 준거틀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준거틀로써의 공부는 타의적인 공부와 자의적인 공부로 나뉘어 해야하는 공부와 하고싶은 공부, 즉 진짜 공부로 그 의미가 분화되었다. 전자를 A라 하고 후자를 B라 한다면, A는 B의 교집합으로써 존재해야 이상적인 공부의 의미가 될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은 그와는 반대로 벌어지고 있다. 외부 환경적 요인인 생존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공부는 학생들이 받아야 하는 압박에 비례하여 흥미를 떨어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부의 의미를 다시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 한다. 많은 지식인들은 그들의 노하우를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다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다른 여러가지의 사고 방식과 철학, 삶을 알아야 자신의 삶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느 곳을 향해 가는지가 파악이 된다. 그렇게 되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많은 의문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하게 되고, 분석하고, 재구성하여 나의 삶과 대입해 보면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다른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사이클은 독서를 계속하는 한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독서를 함으로써 다작, 다상량이라는 다른 2 마리의 토끼까지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독서는 습관이며, 삶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라고 생각한다. 독서를 함으로써 삶의 여유와 정돈된 삶, 삶에 대한 좋은 자세, 현명한 사람들, 행복, 사랑 등 무한한 긍정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어떤가? 이 글을 쓰는 나 조차도 이미 다독, 다작, 다상량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다(多)의 의미와는 아직 멀찍이 서 있지만,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 것 만으로 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니, 어떻게 책을 안 읽을 수 있나, 어찌 공부에 힘쓰지 않을 수 있는가?



앞표지 속지 - 오리아나 팔라치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 10점
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아테네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 1929년 6월 29일~2006년 9월 14일)는 이탈리아의 언론인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 작가’로 불렸으며, 언론인 시절에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많은 인물들을 인터뷰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론인 활동을 중단한 뒤에는 이슬람과 아랍 세계의 문화에 대한 여러 글과 책을 썼으며, 말년에는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네이버 인물, 위키피디아 발췌)


p. 32 -
유권해석 [有權解釋, authentic interpretation, 국가기관에 의해 행하여지는 구속력 있는 법의 해석.]

  공권적 해석(公權的解釋) 또는 강제적 해석이라고도 한다. 학리해석(學理解釋), 즉 문리해석(文理解釋) ·논리해석에 대응된다. 해석하는 기관에 따라 입법해석·행정해석·사법해석으로 구분되나, 협의로는 입법해석에 국한된다.

① 입법해석:민법 제18조 “생활의 근거되는 곳을 주소로 한다”와 같이 입법 자체에 의한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동일법령 속에 해석규정을 설정하는 것, 부속법령 속에 해석규정을 설정하는 것, 법문 중에 예시를 설정하는 것 등이 있다.

② 행정해석:행정관청에 의해 행하여지는 해석으로, 법의 집행을 통해 구체적으로 행하여지는 수도 있으며, 상급관청의 하급관청에 대한 회답·훈령·통첩 등의 형식으로 일반적 ·추상적으로 행하여지기도 한다. 행정해석상에는 유효하나 최종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③ 사법해석:법원, 특히 대법원에 의해 행하여지는 해석으로 이는 최종적인 구속력을 가진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p. 192 - 사람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첫 번째 발견이라면, 독서는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깨닫는 두 번째 발전으로 이끌어준다. 그냥 보고 듣는 것은 겉을 알게 만들어주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속을 깨닫게 해준다.


p. 205 -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 사는 공부는 그 어떤 책이라도 읽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이 공부가 좋은 점은 그냥 아무 책이나 읽어도 진짜 공부가 되는 점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도 어차피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게 된다. 또한 모든 책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어내기 때문에 '과연 내가 제대로 책을 읽는가?' 또는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이미 당신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필요한 것들이 저절로 주입되고 있을 것이다.

p. 209 - 우선 책 전체를 꼼꼼하게 완독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 거의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들이 있다. 바로 핵심교재가 되는 기본서들로, 이렇게 읽어야 하는 책은 줄잡아 30~40권 정도다. (독서만으로 대학 졸업생 수준의 지식을 얻으려면) 두 번째로는 첫 번째 책들처럼 여러 차례 읽을 필요는 없어도 꼼꼼하게 읽어야 할 책이다. (책의 내용에 따라서 이렇듯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p. 210 - 통섭 [統攝, Consilience


통섭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사이언스북스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통섭 이론의 연구 방향의 반대로, 전체를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하는 환원주의도 있다.

1840년에 윌리엄 휘웰은 귀납적 과학이라는 책에서 "Consilience"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통섭의 귀납적 결론은 사실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분야를 통한 결론에 의해 얻어진 귀납적 결론이 또 다른 분야에 의해 얻어진 결과와 일치 할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은 어떤 것에 대해 발생한 사실을 해석하는 이론들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귀납적 결론이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야만 통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여 연구하여 이해하고자하는 학문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각 분야의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이루어져 왔다. (위키피디아 발췌)


p. 260 -
이의역지 [以意逆志, 내 뜻으로써 남의 뜻을 거슬러 구한다.] 맹자의 고자장구상에서 나온 내용. 

 홍대용의 '매헌에게 주는 글(與梅軒書)'의 해석을 보자면,

  "고인이 지은 글에는 의리와 사공(事功) 뿐만 아니라 시문을 짓는 방법이나 기승전결 등 문장의 말기(末技)라도 모두가 각각 그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나의 뜻으로써 고인의 뜻을 받아들여 빈틈 없이 합하고 흔연히 풀리면, 이는 고인의 정신과 식견이 내 마음 속에 침투해 들어온 셈이 된다. 비유컨대, 굿을 하는 무당이 신이 내려 혼령이 몸에 붙으면 훤히 깨달아져 그것이 어디로부터 어디에 왔는지 아는 것과 같다. 능히 이와 같이 되면, 장구(章句)에 의지하거나 묵은 자취를 답습하지 않아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되,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니, 나도 또한 고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서한 연후라야 가히 자연의 기교를 체득할 수가 있다"

 
p. 265 - 딸깍발이, 선비정신의 미덕을 그린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의 수필. 


저      자  이희승 
장      르  수필 
발표연도  1952년 《협동》(제 37호)  

  
  1952년 잡지 《협동》 제37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1956년 일조각(一潮閣)에서 출판한 이희승의 첫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에 실려 있다. 딸깍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남산골 샌님'을 제재로 삼아 전통적인 선비정신의 가치를 되새기며,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현대인들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교훈적 성향의 중수필이다.

수필의 주인공 남산골 샌님은 집안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유교서적을 읽으며 오직 청렴과 지조를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선비이다. 이들은 날씨에 상관없이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다녀 날씨가 맑은 날에는 '딸깍딸깍' 하는 소리를 유난스럽게 내기 때문에 '딸깍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생활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는 이들은 때가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궁색한 차림에 바싹 야윈 얼굴을 하고 있을 망정 심중에는 '앙큼한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이 똘똘 들어 차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작가는 사육신(死六臣)과 삼학사(三學士)를 딸깍발이의 전형으로 보았다. 또 포은(包銀) 정몽주(鄭夢周)와 한말의 순국지사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해 단발령(斷髮令)에 반대해 목숨걸고 상소한 유림(儒林)과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도 모두 딸깍발이의 꺾이지 않는 기백이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궁핍한 삶 속에서도 의기와 지조를 지키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했던 전통적인 선비상을 '딸깍발이'를 예로 들어 제시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현대인의 약삭빠른 삶을 넌지시 비판하면서 딸깍발이 정신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이다. (Naver 백과사전 발췌)
 
... 그러나 본문에서는 "딸각발이 학자가 아니라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유명한 우리 시대의 대표 지식인"이라 표현함으로써 딸각발이의 의미를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학자로 그 의미를 오기하고 있다. 본래의 궁구한 선비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웠다.


p. 270  - 《
불확실성의 시대》, 존 갤브레이스 (1999, 범우사)

불확실성의 시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홍신문화사
  ...저는 이 책을 누구나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읽으면 사고의 틀이 바뀌기 때문이에요. 과거 사고의 틀로는 현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불확실성은 구체적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틀이 자주 바뀐다는 의미의 불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바뀌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지를 놓고 갤브레이스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경제적 사고의 변천을 정리한 책입니다.. (본문 中)



p. 288 - 그러면 진정한 자기계발은 뭐죠?

  "피트니스는 피트니스일 뿐이고 영어는 영어일 뿐입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은 독서행위이지 그 자체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자기계발이라면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은 사람들이 모두 성공해야죠. 그러나 그런 사람을 보셨어요? 영어공부는 영어를 전문적으로 쓰는 통역사나 학원강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직업적 목표가 아니라 수단일 뿐이에요. 그건 자기계발이 아니죠. 결국 제가 생각하는 자기계발의 첫 발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틀을 바꾸는 것, 그게 자기계발입니다. 가령, 평범한 회사원이 있다고 쳐봅시다. 의지도 약하고, 비전도 뚜렷하지도 않고 생활은 반복되는 그런 보통 사람이 자기 의지로 어느 순간 성공한 사람의 사고방식으로 바뀌는 것, 정주영이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 그게 진짜 자기계발이라는 거예요."

p. 290 - 지질하다, [형용사] 보잘것 없고 변변하지 못하다.


섣불리 도망질을 치다가 붙들리는 날이면 지질한 목숨이나마 보전 못할 테니까….≪홍명희, 임꺽정≫
지질한 서방 믿어 보며 사는 계집처럼 가련한 자도 없을 거라.≪이문구, 장한몽≫

지질히, [부사]⇒지질하다.

...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찌질하다"와 동일어라고 봐도 될듯 하다. 네이버 오픈사전에 "찌질하다"로 등록되어 있으나, 댓글 중 지질하다의 잘못된 표기법이라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뒷표지 속지 - 57세 사토씨의 공부 편력기,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사토 도미오 지음, 이수미 옮김/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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