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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분위기 좋은 데서 밥먹고, 술 먹고, 커피먹고, 영화보고, 놀러가고 했지만, 그 끝은 항상 엄청난 출혈과 허무함만이 있기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자친구와 의미있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자친구가 먼저 얘기를 꺼내더군요. 돈 쓰고 술 먹고 좋은 거 먹는 건 평소에도 할 수 있지 않냐면서요. 사실 작년에 여자친구가 필리핀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의 크리스마스를 한 번 지내보니, 한국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오로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같다며, 주변사람들과 오붓한 정을 나누던, 길에서 만난 모든 이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던, 필리핀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동네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한 장애복지시설에 다녀왔습니다.
 
  25일은 시설들도 다 쉰다고 하셔서 24일만 봉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비인가 시설(교회)이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그 시설에는 11살 여자아이부터 50대의 남성분까지 6명의 지체장애우와 목사님 가족분들이 같이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센터를 통해서는 청소나 목욕 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들었지만, 직접 방문해보니 청소를 할 필요도 목욕을 시켜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깨끗한데 어디를 청소하면 되냐고 여줘보니, 잠시 머뭇대시다가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라며 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오는 자원봉사자들이 달갑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들 청소하고, 씻고 다 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오면 시킬 게 없다고, 청소한 데 또 청소시키고, 씻은 애들 또 씻기라고 밖에 할 게 없다 하셨습니다. 그냥 장애우들과 같이 놀아주고 있으면 나중에 확인서 써 주신다고 하십니다. 확인서를 받아도 쓸데도 없었지만, 얘기를 하는 도중에 중 고등 학생들이 1시간 봉사하고 싶은데 확인서 써 줄 수 있느냐는 전화가 자주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의미있는 일이 시설 입장에서는 부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운영의 어려움이라던지, 자원봉사자에 대한 생각, 목사님과 저희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등, 얘기를 하다보니 와서 이런 얘기를 들어주고, 생각을 나누는 일도 목사님 자신의 입장에서는 큰 용기를 받는 일이라고 얘기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체장애 1~2급의 사람들과 6년째 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 자체도 굉장히 힘든 삶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참의 대화 후에, 목사님 자제분들과 저희가 비슷한 또래여서 자식 같으셨는지, 점심으로 특별히 닭을 삶아 주셨습니다. 반찬은 소금과 김치 뿐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11살 짜리 여자아이는 건더기가 있는 음식을 소화시킬 수 없어서 죽만 먹는데,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후에는 일손이 없어 깔 염두도 못 냈던, 거의 썩기 일보직전인 마늘을 깠습니다. 양파 담는 망에 꽉찬 마늘을 까는데 4명이서 3시간이 걸렸습니다. 마늘을 다 까고, 양이 많아 일일이 찧지는 못하고 믹서기에 대충 갈아 1번 먹을 양만큼씩 봉지에 싸 놓았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할 일도 없는 데 부담만 드리다가 가는게 아닌가 걱정했던 저희는 그래도 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모님께서도 평소에는 사람들 챙기랴, 식사 준비하랴 엄두도 못냈던 마늘을 썩기 전에 깔 수 있어서 고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특별한 날에만 봉사하러 오는 것보다 1달이든 2달이든 정기적으로 찾아와주는 게 정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기적으로 가야 뭐가 필요한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일손이나 도우미들이 없어 다양한 이벤트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가족이 총출동해도 4명이기 때문에 단체 산책같은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하셨습니다.
  학교에서 필요로 한 학점 때문에 간 자원봉사 이외에는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원봉사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던 크리스마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글 한번 제대로 쓰지 않던 다운족이었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이렇게 좋은 날을 보내는 방법도 있구나 하시는 분이 혹시나 있을까 하는 기대에, 저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값진 경험이었기에 (사실 목사님께서 이런 얘기는 많이 하고 다녀야 이런 부담스러운 자원봉사 문화가 개선되지 않겠냐고 하시긴 했지만) 이렇게 두서 없는 글을 남겨 봅니다.
 
PS: 현재 그 시설에서 필요한 물품은, 러닝머신과, 오토리버스 기능이 되는 카세트CD플레이어입니다. 혹시 서울 인근이나 강북구 근처에 사시는 분이라면 돈주고 버리지 마시고, 이러한 시설에 기증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겨울에는 야외 활동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거동 자체가 불가능한 장애우도 있지만)하기 때문에 장애우들이 운동이 부족합니다. (특히 성인 여성 지체장애우) 현재 기증받으셨던 러닝머신이 너무 구형이기 때문에 수리가 불가능하다하여 유산소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가 현재는 전무한 상황입니다. 11살의 여자 지체장애우는 거동이 상당부분 불가능하여 24시간 찬송 테잎을 듣는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카세트CD플레이어가 있긴 하지만 테잎을 재생할 시에 오토리버스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장애우나 목사님 가족분들이 테잎을 계속 갈아 끼워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CD를 틀면 되지 않냐고 여쭤보자 그 아이가 바닥을 치거나 플레이어를 치면서 박자를 맞추는 게 버릇이기 때문에 CD같은 경우에는 계속 튀어버린다고 하십니다. 목사님께서는 물건을 사서 주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어차피 안 쓸 물건이거나 버릴 물건이라면 고맙게 받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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